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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본사 논설고문, 前 한국기자협회장 |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은 태양의 신인 아폴론
(Apollon)과 달의 여신인 아르테미스(Artemis)가 만나는 8년 주기에 맞춰서 열린 제사였다. 갈등의 요인이었던 태양력과 태음력의 타협점이 바로 8년 주기였던 것이다. 이 8년 주기가 4년 주기의 올림피아제로 바뀐 이유는 ‘올림픽 정신’과 관계가 있다.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자주 치러 전쟁을 피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를 단합시키려는 아이디어로 제사의 주기를 줄인 ‘평화의 지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올림픽 정신은 근대올림픽의 창시자인 피에르 쿠베르탱(Pierre Coubertin)이 말한 강령 속에 있다. 쿠베르탱은 “올림픽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강령은 ‘공정하게 경기에 임하고, 비정상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불의한 일을 행하지 않으며, 항상 상대편을 향해 예의를 지키는 것은 물론 승패를 떠나 결과에 승복한다’는 배려의 스포츠맨십에 오롯이 담긴다.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엄청난 ‘나라 망신’ 불거져
평창 올림픽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올림픽 개막이 임박한 시점에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팀의 남북단일팀 구성 문제로 논란이 일었다. 선수촌으로 달려간 문재인 대통령은 ‘불공정·불통’에 속이 잔뜩 상한 선수들 앞에서 뜬금없이 ‘역사의 명장면’ 운운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여자 아이스하키 팀을 일러 “메달권에 있지 않다”고 한 말과 아이스하키를 잘 모르는 도종환 문체부장관의 잇따른 언급들은 올림픽의 기본정신마저도 몰각한 실언이었다.
올림픽 막바지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에서 또 다른 엄청난 ‘나라 망신’이 터졌다. 노선영(29)과 김보름(25), 박지우(20)로 꾸려진 한국 여자 ‘팀 추월’ 대표팀은 지난 19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단체전에서 우리는 3분 03초 76을 기록, 기록상 8개 팀 중 7위에 그쳤다. ‘나라 망신’ 거리는 낮은 경기력 문제가 아니다. 3명의 선수들이 눈앞에서 펼친 믿기 힘든 비신사적인 모습이었다.
기자인터뷰 하는 김보름 모습 본 국민들 분노 폭발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경기는 세 명으로 구성된 선수들이 한 팀을 이뤄서 트랙 반대편 출발선에서 각각 출발해 꼬리를 물고 추격하는 방식으로 속도를 겨루는 게임이다. 기록은 세 명의 선수 중 마지막 선수의 결승선 통과를 기준으로 체크된다. 그런데 이 날 경기에서는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될 해괴한 모습이 나타났다. 똘똘 뭉쳐서 함께 들어와야 할 결승선으로 한참이나 뒤떨어진 노선영을 버려두고 김보름, 박지우 둘이서만 먼저 들어온 것이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시합이 끝난 뒤 기자인터뷰를 하는 김보름의 모습을 본 국민들은 분노를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선영에게 망신을 준 행위를 반성하기는커녕 비웃는 듯 싱글대는 표정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한 것이다. 김보름은 이 인터뷰에서 “잘 타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뒤쪽이 우리와 격차가 벌어지면서 기록이 아쉽게 나온 것 같다. 선두는 계속해서 14초대 랩타임을 유지했다”라고 말했다.
‘두 선수 국가대표 자격박탈’ 청원 50만 명 돌파
국민여론이 폭발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올라온 ‘김보름.박지우 선수의 국가대표 자격박탈과 적폐 빙상연맹의 엄중 처벌을 청원합니다’라는 청원은 21일 오후 4시 기준, 50만 명을 돌파했다. 이는 조두순 출소 반대(61만)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청원이다. 청와대는 국민청원이 30일 내에 20만이 넘으면 청와대수석이나 장관급 정부 관계자가 책임 있는 답변을 하게 되어 있다.
백철기 감독과 김보름 선수가 참석한 해명 기자회견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돌아설 기미가 없다. 기자회견에서 김보름은 “경기를 하고 나서 인터뷰를 했었는데 많은 분들께서 상처를 받으신 것 같은데 죄송하게 생각한다. 지금도 많이 반성하고 있다. 진심으로 죄송하다”라고 말했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진심을 모르겠다” “기자회견으로 여론이 더 악화된 듯” “기자회견 보니 더 화가 나네요!”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동안 잠잠했던 빙상계 ‘파벌 악령’ 또다시 꿈틀
외신도 한국의 ‘왕따 논란’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BBC는 “김보름이 팀 동료 노선영의 좋지 않은 경기력을 비난했다”고 보도했고, 캐나다 일간지 더 글로브 앤드 메일 역시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이 팀 동료를 배신하는 유감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다”고 꼬집었다. 미국 USA 투데이는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의 ‘왕따 스캔들’이 올림픽과 한국 대표팀을 흔들고 있다”고 알렸다.
한동안 잠잠한 듯 했던 빙상계 ‘파벌 악령’이 또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당시 선수들은 남녀 대표팀으로 구분되지 않고 ‘한국체대’와 ‘비(非) 한국체대’ 출신으로 나뉘어 훈련을 받았다. 4년 뒤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쇼트트랙의 어두운 승부조작 ‘짬짜미’ 흑막이 세상에 알려져 큰 충격을 던졌다. 2014년 소치 대회에서는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가 3관왕에 오르고 한국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은 노메달에 그쳤다.
잔혹한 ‘왕따’ 횡포 쉽게 물드는 천박한 국민심성 혁신해야
2018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선수들이 때 아닌 ‘왕따 논란’으로 눈물짓는 모습은 한국사회의 슬픈 이면을 상징한다. 한국사회의 ‘패싸움’ 고질병, ‘줄 서기 문화’의 폐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나게 한다. 나란히 올림픽에 나선 동료 노선영을 ‘왕따’한 김보름.박지우 두 철없는 선수들을 아무 일도 없는 듯 용서해도 안 되겠지만, 두 사람을 희생양 삼아 그냥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 뿌리를 낱낱이 캐고 세상을 바꿔낼 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스포츠 경기에서 치열하게 경쟁한 상대편을 향해서도 항상 예의를 지키는 것을 기본정신으로 하는 국가대표선수들이 ‘파벌 악령’에 휘둘려 동료에게 ‘왕따’ 칼질을 하는 짓은 용납할 수 없는 패악이다. 차제에,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배타적인 패거리 문화, 옹졸한 이기주의를 치열하게 반성하고 혁신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안온한 삶을 좀먹는, 사소한 이해관계에 얽혀 불공정하고 잔혹한 왕따 횡포에 쉽게 물드는 천박한 국민심성을 그냥 두고 넘어갈 수는 없다. 보다 나은 내일을 도모할 소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가 정녕 이렇게 막 살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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