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계곡을 넘게 해줘라

서정현
suh310@joseplus.com | 2017-07-28 08:26:08
  • 카카오톡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싸움에도 공정성이라는 게 있다. 최소한 체급이 비슷하고 양쪽의 공격 수단이 유사해야 한다. 한쪽은 주먹인데 다른 쪽은 칼을 들면 안된다. 강자와 약자가 한 링에 오르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다. 그리고 그런 강자가 계속 링을 지배하는 한 약자는 경쟁력을 키울 수가 없다.


그런 종목은 경기가 활성화되지 않고 외면받기 마련이다. 당연히 경기를 활성화 하려면 강자가 약자를 착취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윈-윈 시스템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 시스템이 필요하다. 금수저는 금수저끼리, 다이아수저는 다이아수저끼리 경쟁하며, 흙수저는 흙수저끼리 경쟁하게 해야 한다. 원래 그리고 그것은 자연의 섭리다. 호랑이는 호랑이끼리 경쟁해서 먹이를 가지고, 소는 소끼리 경쟁해서 풀을 뜯어야 한다.


중소기업중앙회 자문위원에 위촉된 지철호 전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의 기사를 신문에서 본적이 있다. 그는 자문위원으로서 “유망한 중소기업들이 많이 생겨나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가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명확했다. 우리나라는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를 포함한 양극화 문제가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며 결국 이를 해소하는 것은 중소기업 성장뿐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중소기업간 ‘갑을 문제’는 오랜 고질적인 문제다. 중소기업 대표들이 하도 울고불고 해서 갑의 횡포를 제재해 시정하는 제도가 생겨났지만 이는 근본대책이 되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갑의 횡포가 일어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납품 단가, 유통업체 판매수수료 분야를 살펴보라.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갑인 대기업이 을인 중소기업을 쥐어짜는 것은 아예 공식처럼 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정부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도 필요하고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정책 또한 필요하지만, 스스로 헤쳐 나갈 여력이 있는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정책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국내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이고, 전체 근로자의 88%가 중소기업에 종사하는데, 중소기업의 환경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체 근로자 88%의 미래도 밝아질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대만은 ‘중소기업의 천국’으로 불린다

그만큼 중소기업이 많고, 중소기업이 활동하기 좋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1980년대에는 대만 중소기업이 수출에서 차지하던 비중이 약 70%였을 정도로 중소기업이 수출을 주도하며 빠른 경제성장을 거뒀다. 우리나라의 대기업 위주의 경제성장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물론 대만도 2000년대 들어서면서 급속한 대기업화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직접수출 분야에서 위축됐을 뿐 대기업 수출품을 위한 중소기업 중간재 납품 등도 포함하는 ‘간접수출’까지 고려한다면 여전히 대만은 중소기업 강국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부러운 것은 중소기업과 대기업간의 관계다. 대만은 양 기업간 항상 대등관계로 이어진다. 대만의 기업들은 서로 협력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는데, 이는 대기업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하는 한편 납품 단가와 관련해서도 대등합 협상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대만의 대기업은 한 가지의 전문분야에 주력한다. 한국처럼 다양한 분야에 문어발식 확장을 하지 않는다. 정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싸울 분야를 정해주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게 한다. 그보다 낮은 리그는 중소기업들이 서로 경쟁을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대기업들의 갑질에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중소기업이 자금난, 인력난, 판로개척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기술개발에 성공해도 대기업의 기술탈취로 폐업 등 막다른 곤경에 처하는 일이 다반사다. 대기업은 계약을 미끼로 기술을 제공받은 뒤 중소기업의 기술을 이용해 상품을 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6년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중소기업이 기술탈취로 인한 피해액이 1조1천억 원이다. 최근 5년간 조사대상 중소기업 총 8천219곳 중 기술탈취를 당했다고 응답한 곳은 7.8%인 644곳에 달했다. 기술탈취 1건당 피해액수도 16억8천만 원에 이른다. 현중소기업수가 무려 354만개에 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술탈취로 피해를 보고 있는 중소기업의 숫자 및 피해금액은 훨씬 더 심각하다.

 

국내 굴지의 모 대기업은 지난 2013년 하청회사로부터 정당한 이유 없이 기술 자료를 받아냈다가 적발됐지만 해당 기술을 유용했다는 증거가 없어 시정 명령만 받았다. 보안솔루션업체 A사도 B은행이 기술을 도용했다며 2년 째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C화학 전지사업부는 배터리 라벨을 제조하는 하청회사에 기술자료를 요구해 받아낸 뒤 하청회사와 거래를 끊고 중국법인에서 직접 배터리 라벨을 만들어냈다. 이 하청업체는 결국 라벨사업을 접게 됐는데 C화학은 기술을 훔쳐낸 대가로 지난해에 고작 1천6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 받는 데 그쳤다.

 

성광모 오성투자개발(주)

 대표이사

이밖에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해 SK텔레콤, SK커뮤니케이션즈, KT, 롯데피에스넷, 이베이코리아, 인터파크, LG화학, LG하우시스, 한전KDN 등에 대해 중소기업 기술탈취 및 기술유용으로 14건이 신고되었지만 과징금 및 시정조치가 이뤄진 것은 LG화학을 포함해 단 2건에 불과했다.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의 기술 자료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하도급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다.

 

변방으로 밀리고 밀린 중소기업들

기술 뺏기고, 사냥터를 탈취 당하고 변방으로 밀리고 밀린 중소기업들은 결국 사람마저도 뽑을 수 없다. 제대로 된 임금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을 짓밟아 번 돈으로 대기업은 고임금을 주며 인재를 끌어 들이지만, 중소기업은 그 밑에서 사람 하나 구하기가 별따기여서 눈물만 삼킨다. 혹여라도 괜찮은 인재가 들어와도 대기업으로 이직하기 일쑤다. 적정 임금을 못 받기 때문이다.

 

한 사냥터에 늑대만 있으면 결국 그 사냥터는 쇠락하고 만다. 늑대가 있다면 소와 양, 사슴도 있어야 한다. 최소한 생존을 가능하게, 아니 죽음의 계곡으로 만들지는 않게 해줘야 어우러져 살 것이 아닌가. 죽어라 고생해서 기술을 만들어도 이를 정부가 보호해주지는 못할망정 빼앗겨도 하소연도 못한다면 누가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하려고 하겠는가. 정부 고위 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글/ 성광모 오성투자개발(주) 대표이사>

[ⓒ 조세플러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카카오톡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