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 에세이] 존재와 역할

편집국
news@joseplus.com | 2018-03-12 07:29:35
  • 카카오톡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두 젊은이의 자기소개를 잠시 들어보자. 주의 깊게.
‘저는 릭입니다. 저는 15살 때 아버지와 함께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처음 참가
한 대회였지만 우리는 완주했습니다. 우리 팀 뒤로 골인하는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딱
한 사람 밖에 없었지만요.


저는 아버지와 의사소통이 힘들었습니다. 컴퓨터를 통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지
요. ‘달리고 싶어요.’ 이게 제가 아버지에게 표현한 첫 번째 감정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이 마라톤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고, 아버지는 심지어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었습
니다.


저는 지금도 누워 생활합니다. 목에 탯줄이 감겨 뇌에 산소 공급이 잘 되지 않아 뇌
성마비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
이는 결국 식물인간이 될 것입니다. 포기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마라톤이 끝나고 나서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처음으로 제 몸에 장애
가 없어진 것 같아요’. 아버지는 말씀 하셨지요. ‘모든 일은 네가 있어서 가능했단다. 아
들아.’ 제 이름은 릭이고, 아버지 이름은 딕입니다. 영화 <땡큐 대디>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저는 벌레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온 몸은 두꺼운 갑옷으로 둘러싸
이고, 손은 없어지고 발만 수없이 많이 달렸네요. 그래요. 어떤 사람은 자고나니 유명해
졌다지만 저는 벌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가족 특히 귀여운 여동생은 제가 굶을
새라 밥과 물을 매일 내 방에 떠다 놓고 다음 날이면 새로운 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부모와 여동생을 부양해 왔으나 이제 벌레가 되었으니 직장에 나갈 수
없게 되었고, 소득활동도 하지 못하게 되었지요.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지내기도 하고,
때로는 나를 투명 벌레 취급하는 가족들이 무슨 말을 하나 엿듣곤 했습니다. 흉측하게
변한 데다 돈까지 벌지 못하게 되자 가족들도 서서히 저에게 짜증을 냅니다.


처음에는 그토록 내 밥을 챙겨주던 여동생이 저더러 나가좋으면 좋겠다고 말하네요.
아버지도 그렇습니다. 어머니만 말이 없네요. 결국 없어져야 할 존재라는 것을 증명이
라도 하듯 아버지는 저에게 먹던 사과를 던졌고, 이것이 제 등에 꽂혀 저는 지금 서서
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벌레가 되어서도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말입니다. 참, 제 이름은 그레고르입니다.’


존재로 평가 받는 자, 역할로 평가 받는 자

조영석 부천대 교양학부 교수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그의 글 《여행하는 인간(homo viator)》에서 가정을 ‘존재가 드러나는 곳’으로 정의했다. 평생 누워 지내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아들이 유명하거나 좋은 직장에 다녀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돈이 많거나 앞으로 그리 될 것 같아서 직장까지 그만둔 게 아니다. 아버지 딕은 아들 릭이 지금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그냥 아들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가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뒤 계산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게 가족이다. 그래서 마르셀도 가정을, 존재가 드러나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레고르는 가족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외로운 존재다. 외로운 존재는 오늘날 자본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도덕과는 무관하게 위법만 아니라면, 혹은 위법하더라도 개인 이기심과 기업 이윤을 충족시켜 주고자 한다. 이기심과 이윤을 채워주기위해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을 넘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에게 일차적으로 가족 부양의 의무를 지우고 그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동안의 경제적 업적과는 관계없이 역할이 종료되면 그 존재는 가치를 잃고 만다. 퇴직한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떤 가치, 어떤 위치를 가질까. 신앙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는 우리 정신을 통해 가정에까지 스멀스멀 기어 들어와 가족을 해체시키고 말았다.


존재의 가치에서 시작되는 건강한 가족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는 없다. 자녀가 없으면 부모는 없다. 아내가 있기 위해서는 남편이 있어야 하고,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녀가 있어야 한다. 그러길래 김남조 시인은 <그대 있음에>에서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마음에 자라거늘/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라고 읊었다. 역할을 상실한 아버지를, 아직도 취직을 하지 못한 자녀를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 주자. 우리는 가족이지 않는가. <글/ 조영석 부천대 교양학부 교수>

 

[ⓒ 조세플러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카카오톡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