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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본사 논설고문, 前 한국기자협회장 |
'인디언 기우제(Indian ritual for rain)’라는 일종의 ‘난센스 퀴즈’가 있다. 사막에 사는 인디언들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오는데, 그 이유가 ‘비가 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라는 교훈이 숨어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도 날이 가물어 농사가 힘들어지면 기우제를 지냈다. 정성을 다해 하늘에 ‘부디 비를 좀 내려주십사’ 간절히 빌어 강우(降雨)의 기적을 일궈내려는 절박한 몸짓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기우제’란 단어가 무려 3천122번이나 나온다.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었으므로 가뭄을 임금이 나랏일을 잘못해서 내리는 천벌이라고 여겼다. 임금은 식음을 폐하고 거처를 초가로 옮기고 죄인을 석방하기도 하는 등 온갖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이것은 한해(旱害) 같은 자연현상마저도 임금 탓으로 돌리는 ‘비상식적’인 사고체계(思考體系)로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민족근성의 뿌리를 깊게 만들었다.
‘비상식적’ 사고체계로 모든 것 ‘남 탓’으로 돌리는 근성 형성
지난해 11월 17일 자유한국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당시 최고위원으로 있던 류여해는 포항 지진을 놓고 “하늘이 문재인 정부에 대해 주는 준엄한 경고, 천심이라는 지적이 나온다”며 “문재인 정부는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문재인 정부가 천벌 받았다’고 말한 것으로 확대 해석되고 보도되면서 류 위원의 적극적인 반박에도 불구하고 ‘천박한 막말’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문재인정권은 각종 사건사고에 대해서 민감하다. 규모가 큰 사고가 발생하면 청와대는 ‘국가위기관리센터’까지 가동하는 등 오버액션을 서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진보세력이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리는데 성공한 ‘탄핵’의 시발점이 곧 ‘세월호 참사’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오죽하면 박 대통령이 탄핵당한 날 문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현장에 가서 방명록에 희생 학생들을 향해 ‘미안하고 고맙다’고 썼을까.
문재인정권 각종 사고에 민감, 건듯하면 ‘국가위기관리센터’ 가동
지난해 12월3일 오전 6시 2분쯤 영흥도 진두항 남서쪽 1.25㎞ 해상에서 급유선이 낚싯배 선창1호를 들이받아 이 배에 타고 있던 선원과 낚시꾼 22명 중 15명을 숨지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기본적으로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사결과를 보면 해경과 정부의 초동대처 능력, 어선법, 수로통행 관련 규정 등에서 숱한 문제점들이 드러나 ‘세월호’ 이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사고현장에 고속단정이 출동한 것은 사고신고를 접한 지 37분이 지난 뒤였다. 10분 운항거리를 30분 이상 걸려 출동한 것이다. 또 배안에 갇힌 승객을 구조할 수 있는 수중구조대는 90분이 지난 7시36분에야 도착했다. 고속보트가 없어 육지로 이동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을 연출됐고, 고속단정이 민간 선박 7척과 한데 묶여 있는 바람에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낚싯배 참사, ‘세월호’ 이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음 드러내
지난 달 21일 충북 제천에 있는 상업용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는 29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다치는 초대형 참사였다. 제천 화재 참사는 1966년부터 기록된 역대 12월 화재사고 중 1971년 서울 대연각호텔(사망 163명, 부상 63명), 1972년 서울시민회관(사망 53명, 부상 78명)에 이은 세 번째 규모였다. 이 화재는 초기단계부터 불길이 급속히 확산됐고 대응인력 부족과 소방통신망 관리 부실, 지휘관들의 상황수집과 전달소홀 등의 문제점이 밝혀졌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특유의 험구(險口)를 펼쳤다. 그는 “그저 정치적인 쇼만으로 순간만 모면하면 된다는 후안무치한 정권”이라며 “정치보복과 정권탈취 축제에만 몰두하는 이 정권이 양심이나 있는지 한번 지켜보자”고 독설을 퍼부었다. 홍 대표는 “(문재인 정부는)정치보복과 정권을 잡았다고 축제하는데 바빠 소방점검·재난점검을 전혀 안 했을 것”이라며 “과연 정권을 담당할 능력이 있느냐”고 질타했다.
한국당 홍준표 대표의 힐난, 소방서장에게나 해야 마땅할 말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는 옛말이 있다. 낚싯배 선창1호의 참극도, 제천 대형화재 참사도 ‘대통령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낚싯배가 유조선을 들이받아 전복되고, 불의의 전기합선 사고로 목욕탕 건물에 불이나 대형 참사로 번지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무슨 원인을 제공했나. “소방점검·재난점검을 전혀 안 했다”는 한국당 홍준표 대표의 힐난은 소방서장에게나 해야 마땅할 말이다.
지난 2014년 4월16일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참극인 세월호 침몰 사건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그때 지금의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을 비롯한 진보진영 인사들이 퍼부었던 온갖 저주의 언어들은 이성적이 아니었다. ‘대선불복’ 심리까지 덧붙여진 온갖 교졸한 논리들은 마치 비극의 모든 잘못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 사건을 일러 ‘교통사고’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병자 취급을 당했다.
정치권, 죽고 다치는 국민들 마음 홀리는 일에만 주력
왕이 만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쥔 전제국가에서, 백성이 당하는 모든 불행을 모두 임금의 탓으로 돌리는 습성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한해와 홍수와 지진과 우박 같은 자연재해마저도 임금의 잘못으로 돌려놓고 살아온 조선의 말로는 어떻게 되었나. 질곡의 세월을 벗어나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된 뒤에도, ‘임금 탓’에 익숙한 국민정서를 악용해 권력을 탐해온 당파싸움의 폐습이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세월호 참사라는 엄청난 비극을 겪고도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후진국형 안전사고는 거듭되고 있고, 우리는 치명적인 부조리와 비합리를 권력투쟁의 불쏘시개로만 쓰려고 하고 있다. 정치권은 문제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다치는 국민들의 마음을 홀리는 일에만 주력하고 있다. 누구도 국민들의 ‘안전 불감증’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기본을 안 지키는 국민들의 의식이 문제라고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사고가 나지 않을 때까지 혁신 위해 싸우는 ‘악착같은’ 국민 돼야
누군가 사고가 나서 죽거나 다치면 그저 ‘재수가 없어서 당한 비참’ 정도로만 취급하고 그냥 넘어간다. 제아무리 큰 재앙이 닥쳐도 자신만은 무사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신앙으로 오만방자하게 살아간다. 재앙을 초래하는 책임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모른 채 뻔뻔한 ‘남 탓’에만 몰두한다. 정치인들은 끔찍한 참사조차 정쟁의 재물로 이용하면서 정작 안전을 위한 입법들은 한없이 미뤄놓고 태평이니 통탄할 노릇이다.
국민들의, 특히 정치인들의 ‘안전 불감증’을 완전히 고쳐낼 의식혁명과 제도개혁이 없다면 ‘세월호 참사’, ‘낚싯배 참변’, ‘제천 화재참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의 무신경과, 알고도 안전을 실천하지 않는 안일함과, 누군가 화풀이 희생양을 지목하여 악다구니나 실컷 하고 넘어가는 뿌리 깊은 ‘남 탓’ 고질병이 문제의 핵심이다. ‘비가 올 때까지’ 온 마음을 바쳐 끝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인디언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사고가 나지 않을 때까지 샅샅이 점검하고, 혁신을 위해 끈질기게 싸우는 ‘악착같은’ 국민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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