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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필자의 머릿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은 국세공무원들이 보여준 특유의 직업근성과 출중한 행정솜씨다. 당시 어떤 요인들이 국세공무원들을 신명나게 했는지는 차치하고, 그들은 어떤 상황에 부딪쳐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약방의 감초마냥 시도 때도 없이 정부 시책에 끼어들었다. 부동산 투기 잡는 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양파 사재기에도 이들이 나서 매점매석 행위를 잠재웠다. 조직도 철저한 상명하복 속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국세행정에 문외한인 군(軍) 출신 청장들도 탄탄하고도 끈끈한 조직력에 힘입어 세정을 잘도 꾸려 나갔다.
초대 이낙선 청장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앞둔 시점에서 획기적인 세수증대를 통해 막대한 재정수요를 뒷받침 해 냈다. 특히나 그는 여러 수사기관에 분장(分掌)되어 있던 ‘세무사찰권’을 국세청으로 일원화함으로서 탈세방지는 물론 국세행정의 권위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오일쇼크와 경기침체로 세수확보가 어려운 나머지 이른바 조상징수(繰上徵收)라는 해괴망측한 편법을 동원했던 2대 오정근 청장.―비록 납세의무가 확정되지도 않은 납세자로부터 세금을 가불(假拂)해다가 국고를 채웠지만 나라살림 밑천 대느라 적잖이 마음고생을 했던 분이다. 그의 재임 기간은 70년대부터 불어 닥친 경기침체의 지속과 극심한 인플레, 환율 상승, 고리(高利)사채에 의존하는 기업자금 심화 등이 절정에 이르던 시절이다. 급기야 국내의 모든 사채(私債)가 동결(凍結)되는 긴급조치(1972, 8, 3,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위한 긴급명령’)가 발동된 것도 그 즈음이다.
3대 고재일 청장은 전임 청장과는 달리 세수호황이라는 운(運)을 타고 내부 조직력 강화에 힘을 쏟은 분이다. 세수확보 위주의 세정에서 탈피, 모든 분야에서 대대적인 쇄신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국세행정의 튼튼한 기반을 구축했다는 평을 듣는다. 국세청 연합조사반을 창설, 오늘의 막강한 조사조직으로 승화시킨 산파역이기도 하다. 4대 김수학 청장은 79년 부마사태(釜馬事態), 10, 26사건,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도 내무관료 출신답게 차분히 세정의 내실을 다져 나갔다. 기장확대 5개년 계획 수립, ‘세금을 아는 주간’ 설정, 우편신고제 도입, 지역담당제 폐지 등이 시행된 것도 이 즈음이다. 5대 안무혁 청장은 내부적으로는 친절세정을 강조하면서 대외적으로는 호화.사치생활로 사회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하는 졸부(猝富)들에게 세정의 포커스를 맞춰 나갔다. 그 과정에서 당시 경제.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이른바 명성(明星)그룹을 비롯한 영동개발(永東開發) 사건 등 당대의 굵직한 이슈를 파헤쳐 사회정의감이 남달랐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이른바 전문인 청장 시대를 연 제7대 서영택 청장은 세정 각 분야의 고도화.전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분으로 평가 받고 있다. 재임 시 ‘공정.신뢰.봉사세정 구현’을 대외에 표방하면서 행정편의 위주의 세정관행 시정에 많은 노력을 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고질적으로 납세자를 괴롭히던 ‘부가세 증액신고 권장’ 폐지를 꼽을 수 있다. 국세청 개청 후 처음으로 내부 발탁(차장에서)되어 수장(首長)에 오른 제8대 추경석 청장은 문민정부 출범 하에서도 청장으로 재임명되는 기록을 남긴 분이다. 업무와 인력의 전문화를 통해 효율적인 근무여건을 조성하는 등 세정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무조사관’제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퇴임 후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으로 몸 고생 마음고생을 치렀던 임채주 10대 청장도 재임 시에는 나름의 공과를 남긴 분이다. ‘국민에게 편안한 세정운영’을 모토로 납세자들의 사전권리구제를 위한 적부심사제(適否審査制)를 시행한 청장이다. 11대 이건춘 청장은 국가 초유의 IMF 사태 속에서도 특유의 행정수완으로 국가재정수요를 합리적으로 확보하는데 성공한, 지(智)를 겸비한 덕장(德將)으로 세정가에 회자되고 있다. 특히나 IMF 사태 당시 올곧은 소신으로 추경예산 편성을 정부에 끈질기게 요청, 무리 없는 ‘세수 행정’을 펼침으로써 우리나라의 ‘대외 신인도’ 향상에 숨은 기여를 했다.
한때 연이은 구속사건 등, 국세청 일부 수장(首長)들의 불미스런 말년은 가슴 아픈 일이기도 했지만 역대 청장들의 올곧은 공직관이 있었기에 오늘의 세정이 존재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일련의 세정변천사를 더듬어 보면서 필자도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된다. 전문지 영역이 불모에 가깝던 70년대 초반, 극도로 열악한 취재환경은 전문지 기자들을 참으로 힘들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국세공무원들의 끈질긴 직업근성을 가까이서 체득한 정신력이, 반(半)세기가 넘는 필자의 여정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그러기에 나는 국세공무원들에게 남다른 애정과 고마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
지금 우리네 국세행정은 대내외적으로 힘겨운 시기를 맞고 있다. 국세공무원들의 절대적 소명인 세수확보에 대한 책무가 버거워서가 아니다. 세(稅) 외적인 환경변화에 시달리고 있다. 외적으로는 세정의 권위가 실종된 듯, 갑(甲)질하는 납세자로 인해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조직원이 비일 비재하는가 하면, 내적으로는 상·하 위계가 실종된 듯, 직급이 허물어지는 극단적 현상도 목격되고 있다. 몇 해 전에는 일선관서장이 부하 직원에게 폭행을 당하는 하극상으로 주변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일사불란한 조직력으로 공무원사회의 이목을 끌었던 국세공무원들의 공직기강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를 두고 세정가 일각에서는 전산(電算)만능인 최근의 세정패턴과도 무관치 않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세정실무를 전산에 의존하다 보니 업무수행 과정에서의 세정 숙련공들의 존재감이 희미해진다. 이런 환경에서 세정의 노하우를 전수(傳授)해주려는 사부(師父)나, 이를 전수(專修)받으려는 제자가 존재할리 만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하 구분 없는 수평 조직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명의 이기(利器)가 가져다주는 일종의 역기능이다.
지난 날, 기업체 경리장부(帳簿)의 잉크 색깔만 봐도 탈세의 감을 잡았다는 아날로그 시대의 조사요원들―. 그 시절을 그리워 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기술세정이 기계세정에 홀대 당하는 풍조가 걱정스럽다. 기술세정과 기계세정의 성과는 그 격(格)이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아날로그 세대이다 보니 이젠 세정에 대한 충고나 지적이 외려 당국자들에게 거부감을 줄세라 두려운 요즘이다. 필자도 이제 세정에 대한 노파심일랑 훌훌 털어 버리고 세정가의 뒤안길로 나 앉으려 한다. 56개 성상(星霜) 세정가와 함께한 긴 여정(旅程)도 여기서 멈추려 한다. 본란의 기명칼럼 역시도 마침표를 찍고 세정의 평범한 관망자로 남으려 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몇 마디 남기고 싶은 사족(蛇足)이 있다. 세정은 항상 겸손해야 하며 ‘권위주의’는 버리되 ‘권위’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또한 세정은 ‘조용할수록 좋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동안 지면을 통해 지적했던 충정어린 고언(苦言)들이 국세행정 발전에 미력이나마 기여를 했다는 평을 들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보람이 없겠다. 긴 세월 끊임없이 졸필(拙筆)을 아껴주시고 격려해 주신 독자제현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리며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기를 두 손 모아 기원 한다.
(심재형/조세플러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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