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칼럼] ‘만기친람(萬機親覽)’의 함정

편집국
news@joseplus.com | 2017-05-24 15:19:44
  • 카카오톡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안재휘 본지 논설고문,

前 한국기자협회장

하루 이틀 사이에 만 가지 기틀이 생기니 여러 벼슬아치들이 일을 저버리지 않게 해야 한다(一日二日 萬機 無曠庶官).’ 서경(書經)에 나오는 이 말은 국가통치의 거울로 여겨져 온 만기친람(萬機親覽)’의 유래다. 국가통치의 규모가 크지 않았던 옛날에는 임금이 온갖 정사를 친히 보살펴 신하들이 저버리는 일을 막는 것이 금과옥조일 수 있다. 오만가지 일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왕이 백성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개혁형 군주로 꼽히는 정조는 우리 역사에 대표적인 만기친람형 왕으로서 큰 일 작은 일 가리지 않고 모든 정사를 챙겼다. 대신들 중에는 정조의 이런 통치 스타일을 못마땅하게 여겨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으나 정조는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으로 나갈 수 있다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8도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읽는 것이 취미라고 했을 정도로 일에 빠져 지낸 그야말로 일벌레 군주였다.

 

만기친람(萬機親覽)’통치규모 적은 옛날에는 금과옥조

 

그러나 일벌레 군주의 원조는 단연 중국의 진시황(秦始皇)이다. 그는 하루에 결재한 서류를 직접 저울에 달아 120석이 되지 않으면 정량에 이를 때까지 일을 만들어 처리했다고 전해진다. 옛날 만기친람이 리더십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던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굳이 의심해보자면, 그렇게 나라 돌아가는 일을 샅샅이 알고 직접 지휘함으로써 역모(逆謀)’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효과를 누린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10여 일 만에 4대강 사업 전반에 대한 정책감사를 지시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정조준하고 나섰다. 이 전 대통령 측은 이미 강도 높은 조사와 수사를 여러 차례 받았는데 또다시 감사를 지시한 것은 명백한 정치보복이라는 반응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번 감사에 대해 개인의 위법, 탈법행위 적발 목적이 아니라고 애써 설명하고 있지만, 이게 과연 그렇게 시급한 국정현안인지부터 의문이다.

 

‘4대강 사업 정책국감’, 과연 시급한 국정현안인지 의문

 

청와대는 다음달 1일부터 녹조발생 우려가 큰 낙동강 주변의 강정고령보, 달성보, 합천창녕보, 창녕함안보와 금강 주변의 공주보, 영산강 죽산보 등 6개 보를 상시 개방하도록 결정했다. 또한, 4대강 민관합동 조사평가단을 구성해 향후 1년간 4대강 전체 16개 보 주변의 생태계 및 수질·수량상태를 평가한 뒤 내년 말까지 보의 철거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해묵은 논쟁의 연장전은 아무래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4대강 사업은 사업기획 단계에서부터 찬반양론이 갈려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다. 국민들은 도대체 이 사업을 놓고 왜 정치권이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며 하염없이 지지고 볶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한쪽에서는 가뭄과 홍수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자랑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수질오염과 환경파괴가 심각하다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퍼뜨리고 있다. 아무리 들어보아도 진실의 문제라기보다는 관점의 문제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정반대 주장으로 하염없이 지지고 볶는 이유 이해 못해

 

청와대의 이번 조치를 놓고도 환영과 우려가 혼재하고 있다. 환경단체 등은 수질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는 반면, 변경조치의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정부의 6개 보 상시 개방 조치로 보의 수위가 낮아질 경우 지하수 수위가 낮아져 영농에 차질을 빚을 수 있고, 방류량이 늘어 유속이 빨라지면 세굴현상으로 강바닥이 패어 보 구조물의 안전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미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감사원이 세 번이나 감사를 실시했다. 특히 이 전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검찰까지 동원해 이 잡듯 뒤졌지만 크게 드러난 것이 없었다. 중립적으로 평가받는 민간 전문가 92명으로 구성된 민간합동위원회가 240회의 현장조사 등 1년을 활동한 끝에 201412홍수와 가뭄 대비 면에서 일정부분 성과를 거뒀다는 내용의 2500쪽의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이번 감사 역시 윗선의 입맛에 맞는 감사가 될 여지

 

취임 이후 국민들의 지지율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파격행보는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청와대가 아무리 극구 부인을 해도 ‘4대강 정책감사는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 거친 정치보복논란을 확산시킬 게 뻔하다. 필연적으로 가야 할 협치의 정치는 또 어떻게 될까도 걱정스럽다. 국민들의 신산한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수많은 정책현안들을 젖혀놓을 만큼 이게 정말 그리 급한 일인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국민의당 박지원 전 대표는 이명박 정부 시절 진행된 4대강 사업의 감사와 관련해 윗선의 입맛에 맞는 감사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감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은 다시 시작할 문재인 정부의 4대강 감사 역시 윗선의 입맛에 맞는 감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제아무리 좋은 뜻으로 시작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칼을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녹여내는 것

 

개꼬리는 한 번에 잘라야 한다는 말이 있다. 개혁은 집권초기 100일 안에 단행하지 않으면 못 한다는 특성도 있다. 문재인 정권이 국민들의 지지와 기대를 발판으로 조기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자 하는 뜻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적폐청산구도가 만기친람(萬機親覽) 방식으로 진행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수많은 국정현안들이 명멸하는 현대에 이 같은 통치방식은 결코 유효하지 않다.

 

박근혜 정부의 참담한 실패가 말해주듯, 일단 만기친람의 습벽에 비밀주의의 관행까지 붙으면 무소불위 의식의 관성이 생기게 마련이다. ‘만기친람방식으로는 결코 참다운 개혁을 이룰 수도 없고, 국민통합 또한 공염불이 될 것이다. 다소 더디더라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개혁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좀 더 생각해야 한다. 진정한 개혁은 칼을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합심하여 녹여내는 것이다. ‘만기친람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그 함정에 걸려드는 순간 또 다른 적폐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조세플러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카카오톡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