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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본사 논설고문, 前 한국기자협회장 |
‘러시안룰렛’은 과거 제정 러시아 때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죽음의 게임이다. 회전식 연발권총(대개 6연발 리볼버)에 총알 한 발만 장전하고 총알의 위치를 알 수 없도록 탄창을 돌린 뒤 상대와 돌아가면서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위험한 게임이다. 이 게임으로 사람이 죽을 확률은 6분의 1, 약 17% 정도다. 영화 ‘디어헌터’에 등장하는 러시안룰렛 장면은 아주 유명하다.
북한이 화성 15형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무장 완성을 선언한 뒤 미국과 중국 일각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용인론이 다시 나오고 있다. 북한 핵과 미사일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으니, 차라리 이를 인정한 뒤 실질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논리다. 지난 7월 ‘한반도 8월 위기설’이 고조됐을 때 미국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다시 제기되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드물지 않다.
北 핵·미사일 용인론, 국내 동조 목소리 드물지 않아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장을 맡고 있는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4일 “북한은 우리처럼 핵우산도 없고, 중국이나 러시아는 북한이 핵으로 위협받을 때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은 안보를 위해 핵을 보유하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시끄럽다. 송 의원은 이날 통일연구원이 개최한 국제 학술회의 축사를 통해 이 같이 말하고 “미국이 평화조약으로의 이행에 대한 절차를 밟아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의원은 논란과 관련 “북핵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엔 공감한다”면서 “북한에 핵을 포기시키려면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면서 압박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해명했다. 그는 “‘내 핵무기는 선한 무기인데 너는 가지지 마라’는 구조로는 북한을 설득해 핵을 포기하게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미국이 핵 위협을 하기 때문에 북한의 핵무장이 당연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주장으로 읽힌다.
북, ‘주한미군 철수’.‘한미동맹 붕괴’ 노린다는 사실은 상식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는 막강한 조직이다. 북한과 중국·러시아 등을 향한 경제 정책의 발굴, 수립, 컨트롤타워, 프로젝트 지원, 정책 조정 등의 ‘엄청난 권한’을 가진 기관이다. 기획재정부·외교부·통일부·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위원으로 참석한다. 그런 조직의 수장이 한 말이니 송 위원장의 언급은 결코 가볍지 않다. 북한의 핵·미사일 용인이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북핵 용인론은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한반도 안보지형을 바꾸려는 북한의 의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북한은 핵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CVID)’ 폐기 대신 비확산 및 추가개발 중단을 조건으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목표다. 그들이 단순한 체제인정 및 김정은 정권의 안위보장을 뛰어넘어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의 붕괴’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미국과 한국, 일본 모두 결단 내려야할 상황 닥칠 듯
맥매스터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북핵이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초래할 수 있다”며 “이는 중국과 러시아에도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러는 지난 11월 29일 북이 미 본토 전역 타격능력을 과시한 이후에도 북에 대한 추가 제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중국은 “할 만큼 했다”며 송유관으로 여전히 원유를 북에 들여보내고 있고, 러시아 외무장관은 “미국이 북의 도발을 유도하는 것 같다”고 어깃장을 놨다.
중·러가 북핵이 마땅치는 않지만 북한이란 전략 자산의 존재가 유지되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계산을 바꿀 개연성은 없다. 대북 제재에 이들이 만들고 있는 구멍은 앞으로 점점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한국, 일본 역시 결단을 내려야할 상황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북을 군사적으로 제압할지 여부와 함께 전술핵 재배치, 핵 공유, 한·일의 자위적 핵무장에 대해 어떤 입장이든 결정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북핵 용인하는 중.러, 한.일 핵무장 반대명분 어불성설
전쟁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항복이나 다름없는 비굴한 태도로 만들어내는 평화는 ‘굴종’일지언정 진정한 평화가 될 수가 없다. 상대방이 ‘평화’라는 화려한 가면을 쓰고 적화통일의 야욕을 내려놓지 않고 있는데, 무릎 꿇고 기도만 올린다고 평화가 지켜지나. 적어도 북한의 핵을 용인해야 한다는 생각을 말하려면 우리도 핵무장을 완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밝히는 것이 옳다. 미국과 전술핵 운용과 핵 공유에 대한 논의를 당장 시작해야 마땅하다.
북한은 머지않아 핵 ICBM을 실증(實證)해 보이고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능력까지 갖추게 될 전망이 많다. 북핵·미사일에 대한 미국과 중·러의 입장이 결정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 임박했다는 얘기다. 맥매스터의 ‘한국과 일본 핵무장론’은 그런 상황에 대비한 포석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한다면 한.일 두 나라의 핵무장을 반대할 명분이란 있을 수 없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최대의 변곡점이 만들어지고 있다.
‘평화’ 맹신 속 대한민국, 치명적인 ‘실수’ 하는지도 몰라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 국민들은 날마다 만성화된 전쟁 공포 속에 살고 있다. 개별적으로 대비를 안 하는 이유는 핵전쟁이 벌어지면 그 어떤 준비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작금 국민들의 삶은 위태롭기 짝이 없는, 17%의 사망가능성을 ‘설마’에 맡긴 ‘러시안룰렛’ 게임과도 같다. 처절한 공포 속에서 차라리 ‘평화’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만 두터워지고 있는 일상은 정말 괜찮을 것인가.
대한민국의 평화는 근거 없는 ‘평화’ 맹신 속에 꽁꽁 갇혀 있다. 그 맹신의 주술들은 이렇다. ‘미국은 절대로 선제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다. 국제사회가 침략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결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절대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다. 한민족이기 때문에.’ …이런 맹신들은 정말 유효한가. 언제까지 유효한가. 어쩌면 우리는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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