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화폐)의 본질
현재 우리나라의 돈은 한국은행이 발행한 동전과 천원 권, 만원 권, 오만원 권 같은 한국은행권이다. 그런데 사전을 찾아보면 화폐는 “거래를 원활히 하기 위해 쓰이는 매개물의 일종”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렇다면 수표는 돈인가? CD(양도성 증서), 보통예금은? 뭐 이런 정도는 교과서에도 나오니까 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음, 상품권은? 마일리지, 포인트는 돈인가? 그리고 요새 떠오르는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는 돈인가 아닌가?
이렇게 범위가 넓어지면 어디까지가 돈인지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돈은 아닌데 실제 현실에서 돈처럼 사용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보니 사전처럼 그렇게 명료하게 정의되고 구분되기가 쉽지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통화의 범위를 M1, M2, M3 등 여러 가지로 분류해서 발표하고 사용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치가 않다.
화폐와 세금은 이란성 쌍둥이
화폐는 물물교환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환의 매개체이고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이며 값을 매기는 척도라고 배웠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화폐이고 먼 옛날 아직 문자도 없던 원시 시대에도 인류는 조개껍질이나 돌, 화살 촉 등을 화폐로 사용하였으며 좀 더 발전한 세상에서는 소금이나 가축,나무 조각 등을 사용하다가 금이나 은 등 귀금속을 거쳐 오늘날에는 종이 돈을 쓰고 있다.
이처럼 돈은 좀 더 편리한 형태를 추구하여 진화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조개나 소금보다는 나무가, 그리고 나무보다는 귀금속이 교환이나 가지고 다니며 사용하기에 편했을 것이고 오늘날의 종이돈은 금, 은보다 여러 면에서 더 편리하다보니 화폐로 쓰이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돈의 기능에 관한 것이지 돈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은 아니다. 왜 많은 자연물들이 있는데 조개껍질이 돈으로 사용되었으며 또, 소금이 돈으로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돈으로 인정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돈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것이 어디에서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물물교환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는 논리는 너무도 단순화한 것이며 그것으로는 화폐의 본래적 임무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화폐의 기원에 대해서는 물물교환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진화했다고 하는 것이 일반론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보면 화폐는 계산단위로서 교환을 매개하고 가치가 저장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화폐를 보는 시각은 논리 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오늘날 화폐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야기시키는 엄청난 부정적인 측면을 은폐하게 된다.
설령 교환의 편리를 위해 매개물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교환의 대상이 되는 물건들의 가치가 평가되어 있어야 한다. 즉 이미 교환하기 전에 교환물의 가치를 재는 척도가 있었고 그것을 서로 받아들이는 증표로서 화폐가 존재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화폐의 기원은 사회적 관계 즉, 원시 사회에서 신과 조상에 대한 책무의 배분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적이다. 인류가 수렵이나 채집에 의해 살던 시절에는 안전과 먹거리에 대한 기원이 있었을 것이고 그 채집물은 마을의 공동소유였다. 이는 지금도 아마존 지역이나 여타 지역의 원시부족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인류문명이 좀 더 발전하여 아주 초기적인 농경으로 잉여물을 비축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신과 자연의 힘에 대한 두려움과 외경심이 자연스럽게 그들에 대한 제사로 발전하였고 이들에게 바치는 제물은 가장 신성한 것이 되었다. 성경에도 아브라함이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제물로 바치려는 장면에 나오는데 그만큼 제물의 상징적 가치는 신성하고 절대적인 것이었다.
수렵을 나가거나 농사를 짓고 혹은 자연재해 등 부족에 대사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제사와 제물이 필요하였고 이를 집전하고 관리하는 제사장(부족장)은 점차 그 사회에서 권위와 정치적 권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사장은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제물에 대한 통제권은 물론 제물 배분에도 관여하게 되었는데 이는 원시사회의 세금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부족사회가 발달하면서 부족민들 사이에서도 사냥이나 수렵, 채취, 농사 등 일종의 원시적 분업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잉여의 일부는 개인 소유물이 되었다. 제사장은 제물의 징발과 부족공유물의 분배과정에서 형평을 맞추기 위한 일종의 등가물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화폐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생산자와 생산시기가 각기 다른 제물과 공물을 징발하고 구성원들에게 배분하며 부족의 공동 저장물을 지키고, 이들 교환과정에서 형평을 맞추기 위한 등가물의 도구로서 화폐라는 매개물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종류는 조개껍질, 짐승의 뼈나 가죽, 돌화살 촉 등 당시 사용하기 적합하고 편리한 것이면 아무 것이나 상관없었다.
이처럼 화폐는 처음에 신과 자연에 대한 인간 사이의 사회적 책무관계에서 탄생하였던 것이며 그 시각에서 세금의 탄생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책무의 분담 역시 인간 사이의 사회적·정치적 권력관계에 따라 배분되었다. 즉, 처음에는 사회의 이런저런 필요에 따라 제사장이나 부족장이 그 배분과 기준을 정하고, 가치규범을 위반했을 때는 그 벌칙으로 얼마 만큼의 벌금을 내야하는지(조개 몇개를 내야 하는지)도 권력이 배분하였다.
예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나온 유물과 기록을 보면 아직 시장에서 화폐에 의한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에 지배권력이 여러 재화 사이에 경제적 등가를 계산할 때, 필요에 따라 가치척도를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있다.
 |
▲ 박일렬 강남대 경제세무학과 교수 |
이후 지역 간에 교역이 활발해지고 시장이 발달하면서 그 화폐기능도 오늘날의 그것처럼 확대되었다. 고대 서아시아에서 오늘날 계산의 척도가 되는 화폐의 기능은 지대와 조세를 조사해서 평가하고 또 여러 다른 물품 사이에 경제적 등가, 즉 보리 한 섬은 직포 1필과 같다는 것을 계산해내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척도의 기준이 되는 화폐의 재료는 일반적으로 은이었지만 실제 유통되는 것은 은이 아니라 ‘보리’가 주로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통용된 셰켈의 가치는 금은화폐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은의 중량에 따라 화폐가치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정했던 은과 보리의 교환가치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이처럼 물품의 가치가 금이나 은의 중량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정한 규칙에 의해 정해졌다는 것은 화폐의 상대적 가치 역시 권력관계에서 정해졌음을 의미한다.
<글/ 박일렬 강남대 경제세무학과 교수>
[ⓒ 조세플러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