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본질은 무엇일까? 탄생 기원에서 보면 돈은 사회적 책무(채무)의 배분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즉 돈의 본질은 채무이다. 우리가 인간인 것은 인간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피부 색깔이
다르고 신체 모양이 달라도 상관없다. 사람에게서 태어났기에 사람이다. 돈은 채무에서 태어났기에 그 본질은 채무이다. 그 본질을 바탕으로 화폐의 기능은 사회적 분화와 발전과정에서 확장된 것이다.
영국에서는 탤리스틱(tally stick)이라는 나무 각목으로 만든 돈을 12세기 이래 700년 넘게 사용한 적이 있다. 처음에 이 나무 조각은 세금을 냈다는 증표였다. 왕에게 낸 세금을 나무에 새긴 후, 반으로 잘라 왕과 납세자가 각각 증표로 나눠 가졌다.
그런데 이 탤리스틱은 사람들 사이에서 돈처럼 거래되고 물건 대금으로 지불되었다. 왕도 나중에는 재정이 궁하자 세금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을 만들어 유통시켰으니 오늘날의 납세영수증 겸 국채도 되는 셈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것보다 가지고 다니거나 보관하기에 편한 것들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이 커다란 각목이 오랫동안 화폐처럼 쓰였는가 하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왕이 이것을 세금을 낸 증표로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정부가 종이에 찍어서 우리가 사용할 돈이라고 법적인 효력을 부여할 수 있지만 당대에는 국가 사회시스템이 아직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금으로 받는 것이 가장 큰 신뢰를 줄 수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사용의 편리성이 화폐의 필수 요소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일화를 들어 돈의 정체가 무엇인지 조금 더 밝혀보기로 하자. 이 실화는 밀튼 프리드만의 『화폐경제학(김병주역,2009)』에 있는 내용이다. 1899년부터 1919년까지 마이크로네시아에 있는 캐롤라인 군도는 독일의 식민지로 가장 서쪽 섬인 얩에는 5~6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섬에는 금속이 없어서 그들은 돌을 정교하게 다듬은 페이(fei)를 교환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돌 바퀴의 직경은 약 40센티에서 5미터나 되는 거대한 것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이 돌 바퀴는 섬에서 수백 킬로 떨어진 섬에서만 나는 암석으로 만든 것인데 그곳에서 가공되어 카누로 운반되었다. 돌에 아무런 표식 없이도 단지 자기의 것이라는 것만 인정받으면 되었고, 거래가 이루어진 후에도 굳이 자기 집으로 운반하지 않고 원래 주인의 집에 그대로 두어도 괜찮았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얘기가 있다. 이 섬에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큰 재산을 가진 한 가족이 살았는데, 그 가족은 물론 마을의 어느 누구도 그들의 재산을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었다. 그 재산은 아주 큰 페이였는데 실제 실물을 본 사람은 없고 단지 이야기로만 전해져 올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그 돌은 할아버지 이전 시대부터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 가족의 이야기로는 조상 한 분이 이 페이를 가지고 돌아오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났는데 배에 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 돌을 바다에 버렸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그 페이가 얼마나 큰 것이고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주인의 잘못으로 바다에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증언했다. 그래서 섬 주민들도 그것을 인정했고, 이후 이 돌이 주인 집 담벼락에 기대어 놓여있는 것처럼 그 돌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섬에는 바퀴달린 운반기구가 없었고 따라서 단지 다른 마을 사람들과 왕래할 길만 있을 뿐 수레가 다닐 길도 없었다. 독일 정부가 스페인으로부터 이 섬을 사들이고 난 후, 주민들에게 길을 닦으라고 시켰지만 원주민들은 그동안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았기에 말을 듣지 않았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자 독일 정부는 궁리 끝에 마침내 마을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집집마다 관리를 보내 값나가는 페이에다 정부소유라는 의미의 십자 표시를 해놓은 것이다. 그러자 즉시 효과가 나타났는데 갑자기 가난해진 주민들이 할 수 없이 길을 닦기 시작한 것이다. 일이 끝나자 정부는 그 십자표시를 지워주었고 이제 원주민들은 다시 돌의 소유권을 회복하고 이전처럼 평화롭고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아주 미개한 섬의 원주민에게나 있을 법한 이야기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예는 20세기의 선진국 미국에서도 일어난 일이다. 1932~33년에 미국이 당초 약속한 달러의 금태환가격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프랑스 은행은 미국연방은행에 예치해 둔 달러 대부분을 금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바꾼 금은 프랑스까지 운반하면 여러모로 불편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단지 연방은행 계정에서 프랑스은행 계정으로 옮기는 것 뿐이었다.
실제로는 연방은행 직원이 금 저장실로 가서 금을 별도의 보관함에 넣고, 그 내용물이 프랑스 자산임을 나타내는 표식을 해두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튿날 경제신문에는 ‘금의 유출’로 인한 미국의 금보유량 감소로 미국의 달러가치가 하락하고, 프랑스의 돈 가치는 올라가는 등 금융시장이 큰 혼란에 빠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이야기의 맥락은 독일 정부가 섬 주민들의 돌에 십자 표시를 해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연방은행지하에 표시해 놓은 표식 때문에 미국의 통화가치가 떨어졌다는 연방은행의 생각과 돌에 표시해 놓은 십자가 때문에 가난해졌다고 믿는 섬 주민들의 생각은 같은 것이다.
또 수천 킬로나 떨어져 있는 미국 연방은행 지하금고에 있는 표식 때문에 프랑스 본토의 통화가치가 올라갔다는 것이나 오래 전 바다 속에 가라앉은 돌 때문에 부자라고 인정하는 주민의 믿음이나 다를 것이 없다. 지금 우리가 돈이라고 사용하는 것이나 주식 같은 재산도 단지 종이에 숫자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지만 누구는 그것 때문에 부자인 것이다.
이 예에서 돈이 되기 위한 중요한 요소가 국민의 신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이 신뢰하면 그것이 돌이건 금이건 상관없지만, 신뢰를 얻지 못하면 정부가 화폐라고 발행해도 그건 그냥 종이에 불과할 뿐이다.
한 예로 소련이 해체될 무렵 루블화의 공식 환율은 1달러에 7루블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루블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암시장에서는 1달러가 3000루블에 교환될 정도로 화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소련과 교역하는 외국 기업들도 루블을 받지 않았기에 루블화는 휴지 조각과 다름없었다.
화폐의 생명력은 정부(채무자), 조세행정, 납세자의 신뢰관계가 부여
국민의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르헨티나와 일본의 경우를 비교하면 더 분명해진다. 20세기 초 한때 아르헨티나는 영국과 프랑스보다 부유한 나라였다. 그런데 페론 정부가 들어서면서 화폐를 남발하고 국채 발행을 급속히 늘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사람들은 자기나라 화폐나 국채를 사지 않았고 부자들은 돈이 생기는 대로 미국 달러로 환전하여 보관하였다. 그렇게 되자 정부는 돈을 더 많이 발행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져 결국 아르헨티나의 페소화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휴지로 변했다.
반면 지난 수십 년 간의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고자 엄청난 돈과 국채를 발행한 일본의 경우 세계 경제가 안 좋을 때마다, 그리고 일본 경제의 침체가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엔화는 가치가 오르곤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 정부의 부채비율이 너무 높다는 점을 들어 일본경제의 위기와 엔화의 몰락을 예언하였지만 현실은 전혀 그런 예측을 비웃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일본 국채와 엔화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신뢰가 굳건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국의 국채와 그것을 바탕으로 발행되는 화폐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기에 국민들은 자기나라 돈에 투자하는 것이다. 국채는 결국 미래 세금을 담보로 하는 것인데 이것이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정부와 채권자, 그리고 궁극적 채무자인 납세자 간에 굳은 신뢰가 형성되어야 한다.
아르헨티나와 일본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국민들의 신뢰가 화폐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다. 즉 화폐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국가의 공신력(이것은 법적인 형식과 세금을 담보로 한다)과 국민의 신뢰가 필요충분조건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조건이 충족되면 그것이 돌이건, 조개껍질이건, 아니면 쇳조각이건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그때 필요에 따라 편리한 대로 화폐로 정해서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한 화폐는 아무리 사용이 편리하다 해도 화폐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만약 화폐라는 것이 사회적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환의 편리성으로 인해 발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회가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국가가 바뀌어도 그 화폐가 폐지되거나 바뀔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화폐의 기반은 세금을 담보로 한 국가의 공신력과 국민의 신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세금을 내는 납세자, 조세행정과 법적 공신력을 책임지는 정부, 그 지불 약속을 받아들이는 채권자라는 사회적 관계가 화폐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삼자의 신뢰관계가 얼마나 중요하고 또 화폐의 생명인지를 유럽의 근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는 18세기 초반 유럽 대륙에서 최고의 강국으로 이런 큰 권력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이때 존 로(John Law,
1671~1729)라는 사람이 프랑스 국채를 미시시피공사의 주식으로 전환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루이 15세에게 제시하자, 부족한 재정과 부채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프랑스 왕이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미국에 루이 14세의 토지라는 의미를 가진 루이지애나라는 대규모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발전이 느렸기 때문에 생각 만큼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궁리 끝에 존 로는 미시시피 강 유역의 공사와 금광 개발을 미끼로 미래의 막대한 수익을 홍보하면서 프랑스 국채를 가진 사람들한테 이 국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라고 부추겼다. 홍보가 워낙 잘 되었는지 사람들이 앞 다투어 주식으로 전환을 하면서 왕의 부채문제는 해결되었다.
지금 같으면 다단계식으로 모집을 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배당도 많이 줄 수가 있었고 그러다보니 인기가 좋아져서 주가는 폭발적인 상승을 한다. 이 과정에서 미시시피 공사의 주식은 마치 화폐처럼 광범위하게 유통되면서 거품이 엄청나게 부풀었지만 어느 날 사업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그 거품은 꺼져버렸다. 결국 존 로의 사업은 엄청난 인플레이션만 일으키고 실패로 끝이 났다.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이 착실하게 성장을 해서 왕의 재정을 지원해주는 계층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사설 은행이 탄생하였고 이 사설 은행을 통해서 왕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금이 주화였는데 금을 보유한 은행가들은 환어음을 발행하여 유통시켰다. 이 환어음은 보유한 금을 기반으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신용도 탄탄했고 덕분에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회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그 후에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이났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재정이다. 전쟁은 경제력 싸움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당시에 대륙을 대표하는 프랑스와 해상 강국으로 떠오르는 영국의 패권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확대되면서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였다.
영국이 승리한 비결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게되면 막대한 재원을 조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즉 전쟁 때에는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신용을 담보로 발행되는 신용화폐가 급속도로 팽창하게 되는데, 이것이 무리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신용화폐라는 것은 곧 미래의 지불약속이므로 채권자는 그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그 신용화폐를 받아들인다. 그만큼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에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왕이 발행하는 신용화폐는 결국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한 약속이다. 영국의 경우 국왕과 국가에 자금을 대부해주는 채권자(사설은행), 그리고 국가부채(신용화폐)에 대한 담보인 세금을 걷는 행정조직과 납세자(국민) 이 세계층의 사회적관계가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즉 영국은 자금을 대부해주는 은행과 세금을 걷는 행정조직, 그리고 세금을 내는 국민의 대표인 의회의 관계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안정적인 재원 조달이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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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렬 강남대 경제세무 학과 교수 |
국채를 매입한 채권자인 부르주아들은 미래에도 세금징수가 제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세금은 국민이 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채무, 국채 발행과 세금 걷기에 관한 세율, 과세대상의 결정 같은 것들이 의회에서 협상되고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금징수와 관련해서 행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관료제 같은 행정조직이 갖추어져서 이 삼자 관계가 유기적으로 잘 돌아가야 재원조달에 문제가 없는 것이다. 영국은 이 관계가 잘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용 화폐가 잘 조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프랑스는 그런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져 있지 않다 보니 재원 조달(화폐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프랑스는 그 당시 루이 14세, 15세가 통치하는 막강한 왕정체제라 왕의 권한이나 권력이 엄청났다. 그래서 재정 조달은 주로 매관매직을 통해, 즉 귀족이라는 특권 계급을 팔면서 왕이 필요한 돈을 일시적으로 조달했고, 세금은 체계적인 행정과 관료 체제를 통해 걷는 것이 아니라 세금 농부(tax farmer)라고 하는 사설 징세대리인이 담당하였다.
왕은 입찰을 붙여서 세금을 가장 많이 걷어 내겠다는 제안서를 낸 세금 농부에게 징수권 자격을 부여한다. 그 사람은 왕에게 약속한 금액만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맘대로 쓸 수 있었다. 옛날 로마시대에 식민지를 다스렸던 총독들이 이와 같은 징세관들이었다. 이 세리들이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는 성경에도 잘 나와 있다.
프랑스의 경우도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이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리가 없었다. 자기들이 선택받기 위해서 왕에게 입찰을 많이 써내야 했고, 그 이상으로 국민들에게 세금을 걷어야 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이렇게 프랑스는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국민의 동의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그때그때 조달하다 보니 지폐 남발과 함께 국민들에게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전쟁 기간동안 생계비가 200배 이상 오를 정도로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국민들을 큰 고통에 빠뜨렸다. <글/ 박일렬 강남대 경제세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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