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정부가 경기조절을 위해 내놓은 정책들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민간부문이 창출하는 화폐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기가 호황일 때는 기업들이 금융권에서 빌리는 돈 말고도 사적인 채무계약이 많이 맺어지면서 유사화폐도 급증한다. 반면에 불황일 때는 신용이 급격히 축소된다. 정부가 유동성을 공급해도 민간부문에서 유사화폐가 사라지면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 수 없다.
현재 세계 경제상황이 그렇다. 세계 각국이 무한정으로 돈풀기를 계속하지만 실물경제가 오히려 디플레이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민간기업과 가계부문에서 신용이 축소되는 규모가 정부의 유동성 공급 규모보다 더 크고 빠르기 때문이다. 실물경제는 사업에 대한 비전이 있을 때 움직인다. 사업 비전도 없는데 금리가 낮다고 해서 돈을 빌려다 투자를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돈풀기를 계속하면 그 돈은 금융권으로 되돌아 오든가 아니면 부동자금이 되어 떠돌 뿐이다.
유사화폐의 위계질서는 굉장히 엄격하다. 그렇지 않으면 화폐 체계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유사화폐의 창출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지, 아래에서 위로는 가지 못한다.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게 자신이 창조한 화폐로 결제를 할 수 없고,기업이 자신이 만든 유사화폐로 일반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극약처방이 필요한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다.
최근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에서 양적완화로 회사채를 인수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채는 민간이 발행한 것으로 극히 사적인 채무 관계인데, 이것을 중앙은행이 법정화폐를 발권하여 교환해준다는 것은 일반 채무화폐를 법정화폐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므로 혁명 수준의 대단한 특례인 것이다.
모든 채무의 보증인은 국민!
그런데 사적채무가 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납세자의 보증이 필요하다. 화폐의 본질이 지불약속(채무)이므로 그것이 세금으로 보증 되지 못하면 화폐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즉 법정화폐이든 유사화폐이든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는 자는 세금을 내는 납세자이다. 국가가 발행한 국채에 대한 지급보증은 국민의 세금이기 때문에 납세자는 원치 않는 채무자가 된다. 또한 납세자는 사적 채무인 유사화폐에 대해서도 궁극적으로는 보증을 서 주고 있는 셈이다.
보증인은 여차하면 보증 책임을 져야 한다.그래서 현재 자신이 빚이 없다고 안심할 일이 절대 아니다.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는 순간 국민은 그 채무를 갚아주어야 하고,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이 사적인 채무관계를 맺고 그것을 화폐화하면 국민은 자동으로 그 채무계약의 보증인이 되기 때문이다. 은행이 도산하고 기업이 부실해지면 국민이 세금으로 그 보증 책임을 졌던 경우가 어디 한 두 번이던가?
정부와 은행의 연금술화폐를 만들 수 있으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황제들은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불문하고 모두 연금술 연구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꿈의 기술이 현대에 이르러 실현되었다. 바로 종이화폐이다. 오늘날은 종이 위에 숫자를 인쇄하기만 하면 무한대의 돈이 탄생한다. 과거세계를 호령하던 황제들이 꿈속에서도 갈망하던 그 연금술이 기적처럼 성공한 것이다.
오늘날 최고로 순도 높은 연금술(법정화폐의 발행)은 정부와 중앙은행이 독점하고 있다. 그리고 순금 못지않은 예금화폐의 발행권은 은행이 쥐고 있다. 일반인들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금단의 영역이다. 개인은 돈을 인쇄해 그 돈으로 가치있는 자산을 구매하지 못한다. 하지만 발권은행은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 개인이 컴퓨터로 통장을 만들어 다른 사람의 계좌에 입금하고 그 댓가로 이자를 받는 일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은행권은 그렇게 한다.법을 이용해 화폐발행권을 독점한 중앙은행은 전체 은행시스템과 공동으로 화폐생산과 인쇄가 가져다주는 이익을 만끽하고 있다. 이들이 주연이라면 정치인은 조연이다.
정치인은 화폐발행을 사랑한다. 정부와 권력엘리트들은 화폐 발행권을 이용하여 갚을 생각은 아예 할 필요도 없이 마음껏 빚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환심을 사고 표를 얻기 위해 공약을 실천하고자 하는 정치권력은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데 세금은 그다지 사랑받지 못하는 방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폐발행은 국민들로 하여금 경기가 좋아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면서 그 실질적은 화폐발행의 이익은 자기들이 독점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처음 새로 만들어진 돈은 사람들의 수중에 동시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돈을 가장 먼저 손에 넣는 사람은 큰 이익을 본다. 그들은 아직 오르지 않은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고 자산을 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뒤늦게 그 돈을 손에 쥐는 사람들이나 혹은 아예 한 푼도 쥐지 못하는 사람들은 피해자가 된다. 그들의 수입이 늘어날 때 즈음이면 물건과 자산가격은 이미 올라있어 오히려 상대적인 박탈감만 더할 뿐이다. 이처럼 추가로 만들어진 화폐의 작용은 구조적으로 소득과 자산의 재분배를 일으켜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진행된 재분배는 언제나 그렇듯이 되돌릴 수 없이 영구적으로 고착되는 경향이 있다.
 |
▲박일렬 강남대 경제세무학과 교수 |
화폐의 증발은 국민들에게 세금에 대한 보증인의 책임을 지우는 것도 모자라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평범한 일반 사람들에게는 월급만으로 더 이상 먹고 살기 힘들고,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힘든 세상이 되지만, 발권력을 가지거나 그들과 좋은 관계 유지하고 있는 슈퍼리치들과 정치권력들은 다수의 희생을 댓가로 더욱 부자가 되게 만들고 있다.
더 걱정스러운 점은 앞으로 신용화폐의 종류와 규모가 더욱 팽창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사이버머니 같은 인터넷 기반의 새로운 지불시스템도 등장했다. 이것이 기존의 법정화폐와 같은 권위를 가지게 될지, 새로운 유사화폐에 머물지는 아직 예단할 수 없지만 앞으로는 이러한 화폐가 급성장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생태계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수많은 금융권과 기업들은 새로운 채무관계를 끊임없이 확대시킬 것이고 그에 따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유사화폐 또한 급증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만큼 화폐를 창조할 수 있는 자들의 경제 권력은 확대될 것이고, 세상이 돈으로 넘쳐나도 그들의 채무보증 서기에 바쁜 힘없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이것은 21세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숙명이다.
<글/ 박일렬 강남대 경제세무학과 교수>
[ⓒ 조세플러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